23일 삼성전자 직업병 조정위는 "삼성전자가 1천억 원을 기부해 조정권고안 실행을 담당할 공익법인을 설립하라"고 권고했다. 이들은 "기부는 삼성전자가 이번 조정 사안을 사회적 의제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전향적이고 대승적인 태도이며,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충실히 다하겠다는 의지를 가시적으로 보여 준다"고 밝혔다. ⓒ 손지은

기흥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지난 2007년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의 죽음으로 우리나라 반도체 노동자들의 백혈병 피해가 공론화된 지 8년이 지났다.

삼성측과 사회적 연대인 반올림이 지난 2013년 1월 실무교섭을 시작해 2년 여 동안 교섭을 벌였지만 진척이 없자 6명의 피해가족들이 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가대위)를 꾸려 교섭의 주체로 참여하면서 삼성-반올림-가대위가 3자 협상을 별었다. 이에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아래 조정위)가 23일 대책 방안을 내놨다. 

삼성전자가 1천억 원을 기부해 공익법인을 설립하고, 이 법인이 주체가 되어 해결책을 실행하는 안이다. 이를 삼성전자와 가족대책위,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모두가 받아들이면 마침내 이 문제는 8년 만에 해결 국면으로 접어든다.

조정위는 지난 23일 서울 서대문구 법무법인 지평 회의실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A4 24장에 달하는 권고안을 발표했다. 지난해 12월 9일에 구성된 조정위가 수차례에 걸쳐 삼성전자와 가족대책위, 반올림의 요구 사항을 청취한 뒤 이를 종합해 내린 결론이다.

8년 만에 보상·사과·재발방지 포함한 종합안 도출

이날 김지형 조정위원장은 먼저 "삼성전자가 1천억 원을 기부해 조정권고안 실행을 담당할 공익법인을 설립하라"고 권고했다. 반도체 사업체를 회원으로 둔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또한 기부금을 보태라고 제시했다. 그 이유로는 "기부는 삼성전자가 이번 조정 사안을 사회적 의제로 해결해 나가겠다는 전향적이고 대승적인 태도이며,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충실히 다하겠다는 의지를 가시적으로 보여 준다"고 밝혔다.

보상 범위와 사과 방식, 재발방지 대책도 구체적으로 내놨다. 그동안 이를 두고 이견을 보였던 3주체에게 "가능한 한 많은 양보와 타협"을 주문했던 조정위는 이번 조정안이 "개인을 넘어선 사회의 공동선을 추구"했음을 강조했다.

먼저 보상은 신설되는 공익 법인을 통해 이뤄진다. 법인의 발기인은 공익 목적의 사회적 기구로서 운영되기 위해 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 단체에서 각 1인씩 추천을 받아 위촉한다. 조정위가 추천한 단체는 대한변호사협회, 참여연대, 산업보건학회 등 총 7곳이다.

보상 대상은 2011년 1월 1일 이전에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및 LCD를 생산하는 업무를 1년 이상 담당한 노동자로 제한된다. 이들 중 발병 당사자 혹은 유족에게 요양비와 위로금 등이 지급되며, 금액은 질병에 따라 각기 다르게 책정된다. 질환 범위는 전문가 자문과, 학계 연구, 관련 역학 조사 결과 등을 토대로 업무 관련성과 개연성 따라 1·2·3군으로 나눴다. 백혈병, 림프종, 다발성골수종 등은 1군에 포함된다.

재발방지 대책으로는 삼성전자 내부 재해 시스템 강화를 주문하고, 이를 공익 법인이 지속적으로 확인·점검하는 방안을 권고했다. 조정위는 삼성전자에게 50여 명 규모의 보건관리팀을 신설해 산업재해로 의심되는 질환이 임직원 사이에 발생했을 경우 이를 조기에 치료하는 등 선제적 대응을 하라고 주문했다. 사업장에서 사용·반입되는 모든 화학제품을 수시로 조사해야 한다. 만약 무작위 조사에서 위험 물질이 발견된다면 즉시 사용을 중지해야 한다.

사과 방법으로는 삼성전자의 대표이사가 기자회견에서 사과문을 낭독하라고 제안했다. 그 안에는 일찍이 노동자들로부터 사업장에서 백혈병 등 질환이 발생했다는 문제가 제기됐음에도 충분히 관리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내용이 담겨야 한다. 나아가 이로 인해 불행을 겪고 있는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도 진정성이 있는 사과의 뜻을 표시하라고 권고했다.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은 공익법인이 선정한 보상 대상자에게도 개별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동시에 오랜 기간 협상을 벌인 3주체에게는 "노동자의 노동건강권은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당연하게 누려야할 기본권이며, 사회와 국가, 노-사 모두가 함께 지켜나가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노동건강인권선언을 공동으로 진행하라"고 권했다.

삼성전자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 포함돼 있다"

조정위가 3주체의 요구사항을 종합적으로 담은 구체적 안을 제시했지만, 이것이 실제 실행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반올림 측이 해결의 의지를 강하게 밝힌 반면, 삼성전자 측은 조정안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의제기는 권고안을 받은 날로부터 10일 안에 가능하다. 수정안이 들어온다면 조정위는 후속 조정 절차를 밟고, 그렇지 않으면 3주체가 모여 합의서를 쓰는 것으로 절차를 마무리 한다.

황상기 반올림 교섭단 대표는 이날 조정위를 마치고 기자 브리핑을 열고 "발표한 양이 상당히 많아서 섬세하고 자세히 검토해봐야 반올림 의견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다만 "긴 시간 끌어왔기에 빠른 시일 안에 해결해서 많은 피해자들의 아픔을 덜어주고 싶다"며 "그러기 위해선 삼성전자도 더 적극적으로 나서 달라"고 요청했다. 가족대책위는 따로 회견을 열지 않고 "검토한 뒤에 입장을 밝히겠다고"만 짧게 전했다.

삼성전자 측은 이날 오후 4시50분께 문자메시지로 "가족의 아픔을 조속히 해결한다는 기본 취지에 입각해 조정위의 권고안을 신중히 검토 하겠다"면서도 "권고안 중에는 회사가 여러 차례 걸쳐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힌 내용이 포함돼 있어 고민되는 것이 사실이다"라고 전했다.

이번 권고안은 지난해 12월 9일 조정위가 구성된 이후 처음으로 나왔다. 지난해 5월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가 사과와 보상 방안을 밝힌 지 1년 2개월 만이다. 동시에 반올림이 문제를 제기한 지 8년 만에 이룬 성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