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중공업 전 노조위원장들과 현장 활동가들이 14일 오후 3시 30분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정문앞에서 오종쇄 위원장의 교섭권 위임을 성토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오른쪽에 지난 3월 4일 이영희 노동부 장관이 참석해 열린 '노사공동선언 실천과 글로벌 위기 극복을 위한 전사원 결의대회' 장소인 현대중공업 체육관이 보인다.

"한때 오종쇄와 노동조합과 노동운동의 동지였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기자회견문을 읽어 내려 가는 이갑용 전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의 목소리는 격앙돼 있었다. 14일 오후 3시 30분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정문앞에는 전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들과 현재 조합원 100여명이 모여 오종쇄 위원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들은 또 민주노조를 현대중공업에 새로 세울 것을 결의했다.

현대중공업 오종쇄 노조위원장이 지난 3월 2일 최길선 사장에게 올해 임금인상안을 공식 위임하면서 그 여파가 전국적으로 번져 '임금 삭감' '임금 동결' 결의가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게 나오고 있다.

오 위원장이 경제위기를 내세우며 노조의 생명과 같은 교섭권을 회사에 반납한 지 11일 뒤인 3월 13일,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 당기순이익이 모두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특히 올해는 더 높은 목표치를 내 놓았다고 발표했다..

지난 13일 울산시 동구 한마음회관에서 열린 현대중공업 '제35기 정기 주주총회' 영업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이 회사 매출은 19조9570억원(전년도 대비 28.5% 증가), 영업이익 2조2061억원(26% 증가), 당기순이익 2조2566억원(30% 증가)으로 모두 사상 최대 실적을 나타냈다. 또한 2009년 사업계획은 매출 22조8761억원, 수주 211억 달러, 시설투자 1조4300억원, 기술개발투자 2367억원으로 발표됐다.

오종쇄 노조위원장은 이날 주주총회에서 "회사의 위기 극복을 위해 노동조합은 올해 임금인상안을 회사에 위임했다"며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고객과 시장으로부터 지속적인 성장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노조도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고 이익 내고 위기라면?

14일 현대중공업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은 "현대중공업 올해 영업이익은 2조원을 넘고, 정몽준의 현금배당만 616억"이라며 ""민주노조라면, 수조원을 번 회사와 앉은 자리에서 수백억을 벌어들인 이들에게 고용안정기금을 출연하라는 게 도리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현대중공업이 위치한 울산 동구청장을 지냈고 이 회사 해고노동자이기도 이갑용 8대 노조위원장을 비롯해 현직 조합원인 김임식(10대) 김종철(12대) 김덕규(13대) 전 노조위원장과 현장 조합원 등 100여명은 목소리를 높았다.

이들은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임금인상분을 3년간 다 모아도 정몽준의 주식배당금에 못 미친다"며 "교섭권 위임은 민주주의를 짓밟는 독재요 폭력"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는 지난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시작으로 이후 노동자 권익찾기에 앞장섰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이들은 "조합원의 투표권은 목숨과 피로 쟁취해낸 작업장의 민주주의"라며 "그런데 오종쇄는 조합원들의 피눈물 나는 투쟁의 산물을 하루아침에 내버렸다"고 밝혔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에 앞장 선 한 노동자는 "87년 이전 노동자들은 출근 때 회사측이 바리깡(머리깍는 기계)을 들이미는 등 비인권적 대우를 받아 왔고 우리는 항거했다"며 "교섭권은 임금을 떠나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표출이다"라고 말했다.

전 노조위원장 등은 "회사보다 더 회사를 걱정하는 노조집행부가 몇 대를 거쳐 노조를 장악하더니 지금 현장은 죽음의 일터로, 비정규직은 하루아침에 마구잡이로 해고되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이어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노조위원장이란 사람은 조합원의 권리를 점점 더 회사에 내주고 있으므로 민주노조를 세우는 길만이 이런 사태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조합원을 팔아먹고도 뻔뻔하게 조합원을 위해 한 일이라고 떠드는 오종쇄를 사퇴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장 조합원, 비정규직 얘기 들어보니...

현대중공업 조합원인 한 노동자는 "지금 현장 분위기는 오종쇄 위원장의 교섭권 반납에 대해 분노하고 있지만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불만을 표출하면 관리자로부터 면담이 들어오고 회사에 찍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현대중공업 도장부에 근무한다는 한 조합원은 "초등학생도 알고 있듯이 조선소는 몇 년치 물량을 선 주문 받는데, 현대중공업도 3년치 물량을 주문받아 놓고 있다"며 "교섭권을 주면서 3년간 고용보장을 얻어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올해 들어 한두 달 수주를 못 받은 것은 맞지만 현재 있는 물량으로 볼 때 위기라고 강압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경제위기를 핑계 삼아 쇼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교섭권 반납에 따른 현대중공업 비정규직(하청)의 입장은 더 난처한 상황. 현중 사내하청지회 조성웅 지회장은 "근래 하청 노동자 수 백명이 해고됐다"며 "직영에서 교섭권을 갖다바쳤는 데, 우리 하청들은 어디서 무슨 하소연을 하겠나"고 되물었다.

이날 참석자들은 오종쇄 위원장의 사과와 사퇴, 현중노조 교섭권 위임으로 뜻하지 않게 고통받는 전국의 노동자에 대한 사과, 경제위기를 빌미 삼아 현중 노조와 노동자를 파멸로 몰아가는 사측의 행위 즉각 중단 등을 요구했다.

또한 노동자양보론(임금삭감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폐기를 위한 공동투쟁, 조선사업장 활동가들의 교류와 연대 공동투쟁 강화, '노사상생 강령 및 노사상생 복지노조론' 폐기를 위한 공동 투쟁 등을 결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