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천

2008년 5월 9일 오늘 아침 7시부터 여의도에서 방을 뺐습니다.

  제가 20년째 데리고 있는 법무법인의 홍준희 실장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부터는 의원회관 안 가시는 게 좋겠다'며 힘겨운 조언을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야,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곤 다시 오늘 오후 텅빈 방에 나와 글을 씁니다. 물론 책장 사이사이를 가로지르는 먼지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느껴지시죠?

  저야 뭐 어릴 때부터 수없이 이사를 해서 이런 분위기에 너무 익숙합니다.

  텅빈 방에 새로 이 방을 쓰실 당선자를 위한 새 책상이 덩그라니놓여있습니다.

  죄송스럽게도 제가 며칠 동안 이 책상을 쓰게 됐습니다. 그 분께는 미안한 생각이 드는군요.

  사실 방을 이렇게 빨리 뺄 필요가 없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당선되고 나서 '빨리 방 배치를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고 아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설레임 때문이었고, 기대감 때문이었겠지요. 어서 가서 일하고 싶었던 그런 열정이 팍팍 뛰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기분으로 방을 미리 빼는게 옳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낙선한 다음날 이 문제를 상의해서 계획대로 진행한 다음, 드디어 오늘 제가 변호사로 일하던 강남으로 책과 소지품과 책상과 책장을 모두 가져가게 됐습니다.

  제가 좀 깐깐한 성격이라서 제 방에 쓰는 모든 물건을 국회에서 나눠주는 것이 아닌 제가 이미 사용해왔던 것을 가져오거나 부족한 것은 새로 구입해서 사용하고 있었거든요.

  지금 빈 방을 보니 국회에서 나눠준 거라곤 딱 2가지가 남아있더군요. 하나는 TV, 하나는 노트북.나머지는 모두 방을 빼면서 제가 다시 가져가게 됐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한결 편하고 익숙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방을 빼고나면 특별한 기분이 들까 염려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모든 것을 빼내고 난 빈 방에서 글을 써보니 특별히 다른 기분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아마 철이 아직 덜 들어서 그런 모양이지요

/17대 국회의원(서울 성동갑) ·변호사 최재천